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 협상 (문단 편집) == 여담 == * 1904년 영불협상 체결 당시,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원한이 쌓일 대로 쌓였던 터[* 당장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이 터질뻔한 [[파쇼다 사건]]이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라 자국 외무장관한테 '너 머리에 총맞았냐'라는 식의 비난이 쇄도했지만 워낙 공공의 적이었던 독일 제국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지라 생각보다 쉽게 여론의 반발을 무마했다고 한다. * 당연히 독일도 바보가 아니라서 삼국 협상을 무너뜨리기 위한 시도를 여러번 했다. [[러일전쟁]] 이후 금융위기에 빠진 러시아 제국에게 막대한 금융지원을 해주는 대가로 [[러불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막대한 [[쇼미더머니]]에 밀리고 만다.[* 물론 당시 독일이 프랑스보다 경제 규모도 크고 산업화도 잘 되어있었다. 이 당시 프랑스는 인구나 경제 규모에서 독일의 60%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에 비해 산업화만 뒤쳐졌을뿐 금융업, 농업, 등의 분야에서 프랑스는 당시의 독일을 상회하고 있었다. 이러한 저력을 통해 프랑스는 러시아에 대규모 차관을 지원했고, 러시아는 프랑스로부터 들여온 차관들을 통해 철도와 같은 인프라 확충과 군비 확장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결과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 개전 초기에 독일의 예상을 뛰어넘는 신속한 동원 능력을 보여주며 독일의 동부 전선에 군사적 압박을 가했고 이는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지금도 EU의 농업, 축산업 생산의 40%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을 만큼 독일-오스트리아는 단 한번도 인구부양력에서 프랑스를 넘지 못했다. [[나폴레옹 전쟁]] 때만 해도 프랑스군이 독일에 쳐들어 갔을 때 "[[프로이센]] 땅에는 왜 숲 밖에 없어?!" 라면서 불지르고 돌아 다녔을 정도.] 가장 유명한 시도가, [[러일전쟁]]으로 영국에 이를 갈던 [[니콜라이 2세]]와 [[빌헬름 2세]]가 1905년 7월 24일, 핀란드 만의 비외르쾨 섬에서 만나 독러 비밀 군사동맹을 합의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비외르쾨 밀약이라 부르는 것으로 실현되었다면 비스마르크 체제로의 복귀, 하다못해 동부국경을 안정시키고 프랑스에 올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 [[두마]]에서 강력히 반발해서 없던 일이 되었다. * 사실 독일은 1905년 1차 [[모로코 위기]] 때부터 자국이 실질적으로 [[왕따]]가 되었음을 실감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야 뭐 19세기 후반부터 내림세를 타던 국가였고, 국가의 구성 인종이 너무 다양한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 자체가 타 열강들에 비해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아예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통일과 산업화를 이뤄내며 일본과 함께 열강 말석을 간신히 차지하게 된 국가였기에 훨씬 이전부터 통일된 국가와 산업화를 이루고 전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통적인 열강들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국력이 매우 후달렸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인구라도 많았지만 이탈리아는 오스만과 함께 1차 세계대전 참전 열강 중 인구수가 4000만도 되지 않던 둘 뿐인 국가였다. 그것도 물론이거니와 전반적으로 동맹국 지원에 대해 무관심. ~~그리고 1차대전에서는 기어이 배신~~]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로코]]의 독립과 문호개방을 요구했는데 [[영국]]이 프랑스의 편을 들어줘서 망신만 당하고 만 것이다. [[분류:1907년 협정]][[분류:유럽사]][[분류:영러관계]][[분류:영국-프랑스 관계]][[분류:러시아-프랑스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